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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권, 도시재생/(주)동네목수의 장수마을 집수리 이야기

301-12번지 임영철 할아버지네 집수리..

사실 301-12번지 집수리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꺼리가 없다.

2012년 여름 장마에 갑자기 축대와 담장이 무너져서 공사를 한 게 전부다.

그런데 임영철 어르신이 1주일째 집에 돌아오지 않으셔서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 하는 마음에 올려본다.

 

임영철 어르신은 거동이 불편해서 지팡이 하나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다니신다.

산책을 하실 때면 발걸음의 폭이 한뼘도 안되는 것 같은데, 뒤뚱거리며 열심히 걸으시는 모습이 마치 펭귄걸음같다.

워낙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마을버스 종로03번 종점과 낙산공원 근처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평소에 내 인사도 잘 받으시고 산책을 열심히 다니셔서 치매 증상이 있는 줄은 몰랐다.

평소보다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었거나 쓰러져 있는 걸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거나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지만,

근처의 병원이나 경찰서에 수소문을 해도 아직은 소식이 없단다.

 

발견시 제보처: 국번 없이 182 또는 112

 

 

 

임영철 어르신도 예전엔 건축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몇년 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신 것 같다.

예전에 건축일을 좀 하셨다는 어르신들이 대체로 몸이 좋지 않은 걸 보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는지 짐작이 간다.

 

임영철 어르신에 대한 첫 기억은 2012년 여름 장마에 담장이 무너졌다고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거동을 못하셨던 것 같다.

 

장마에 무너진 축대와 담장 모습..

축대와 담장이 옆집과 바짝 붙어 있어서 작업 공간이 거의 없어 보인다.

 

담장 보수공사는 50년 경력을 자랑하는 미장공 권씨아저씨한테 맡겼다.

달동네 기술자들이 대개 그렇듯 권씨아저씨는 미장공이지만, 조적이나 설비도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어서 자잘한 땜빵일은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이다.

임영철 어르신의 형편이 넉넉치 않아서 시멘트블럭은 동네목수가 보관하던 걸 쓰고, 임영철 어르신의 아들(손자?)이 보조로 일을 거들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예상보다 컸다.

기초가 없이 쌓였던 담장이라 축대 바닥을 긁어내고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7월 말이고 사방이 막혀서 바람이 통하지 않는 집이라서 작업을 하는 권씨아저씨는 땀을 비오듯 흘렸고,

"세상에 기술자한테 삽질을 시키는 경우가 어디 있어?"라면서 나한테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사태는 좀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권씨아저씨는 임영철 어르신의 상태가 안쓰러웠던지 계획에 없던 일을 만들기 시작한다.

계단이 부실하다고 털어내고 다시 쌓고, 마루가 높아서 어르신이 오르내리기 불편하겠다며 발판을 만들고..

아무튼 불편한 어르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저것 다 해주겠다고 나섰다.

하루나 하루 반을 잡고 시작한 일이 결국 3일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일을 공짜로 할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권씨아저씨는 생색은 자기가 다 내고, 일당은 3일치를 에누리 없이 다 받아갔다.

동네목수는 손해를 봤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벌써 3년 반이나 지난 일을 들추며 혹시라도 임영철 어르신이 산책하는 모습이라도 사진을 찍은게 있을까 싶어 노트북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다.

오며가며 인사하고 가끔 계단 오르내리는 걸 잠깐 도와드리는게 늘상 있는 평범한 일상이기에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한 번도 안했던 것 같다.

성곽길에서 어르신의 펭귄걸음을 다시 보면 좋겠다.